조선의 백성들에게 영웅으로 기억된 스님

수년전, 불교계 대선배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조선시대 야담에 등장하는 스님들을 소재로 논문을 써서 잡지에 실으라는 요청이었다. “그건 제 전공이 아닌데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끝내 꺼내지 못했다. 그날부터 반년 동안 도서관 문학 서가를 뒤지며 조선시대 야담집을 읽기 시작했다.
사실 자료를 펼치기도 전에 내 머릿속에는 논문의 줄거리가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 지배층이 아니라 민중에게 다가간 불교, 억압받던 조선불교가 민간 속에서 이어간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모습을 야담에서 찾아내겠다는 것이었다. 결론부터 정해놓고 자료를 찾으러 간 셈이다.
그러나 야담 속 스님들은 내 기대와 전혀 달랐다. 원효대사처럼 저잣거리에서 사람들에게 나무아미타불을 가르치는 스님도, 진표율사처럼 평범한 백성에게 계를 내려주는 스님도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조선시대 야담에 등장하는 스님은 대체로 둘 중 하나였다.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은 신이한 승려[神僧]거나, 욕망에 빠져 조롱받는 타락한 승려[妖僧]였다. 그 가운데에서도 압도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남긴 인물은 바로 사명대사였다.
<한국구비문학대계>의 임진왜란 영웅 관련 설화 가운데 김덕령은 31편, 곽재우는 23편, 서산대사는 18편, 이순신은 13편, 정기룡은 7편의 인물 이야기가 올라 있는데 반해 사명당에 관한 설화는 무려 45편이 실려 있다.
설화 속 사명대사는 이미 승려라기보다 신선이나 도사에 가깝다. 이야기의 세부 내용은 조금씩 달랐지만 구조는 거의 비슷하다. 일본인들은 깊은 함정을 파고 포악한 코끼리와 독사를 집어넣은 뒤, 사명대사를 그 위에 앉힌다. 불에 달군 쇠로 된 말을 준비해 올라타게 하는 등 온갖 계략으로 스님을 위협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명대사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팔만대장경을 외우거나 폭우를 쏟아지게 하는 등의 신통력을 발휘해 모든 위기를 벗어난다. 끝내 일왕은 스님의 능력 앞에 굴복하고, 사명대사는 “다시 한번 조선을 침략하면 일본 땅을 바다로 만들어 버릴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 이야기에서 일본은 조선을 짓밟았던 강대한 적국이 아니었다. 한 명의 조선인 스님을 해치려고 온갖 계략을 꾸미다가 도리어 굴복하는 어리석고 비겁한 나라였다. 전쟁의 현실에서는 조선의 국토가 유린당했지만, 설화 속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뒤집혔다. 사명대사는 일본의 위협을 물리치고 왜왕을 무릎 꿇리는 승리자가 되었다.
평양성 전투 참전, 가토 기요마사와의 강화 협상 참여
일본 각지에 흩어진 조선인 포로 3000여 명 데리고 와
사람들은 왜 이처럼 사명대사를 신비로운 영웅으로 만들어 냈을까.
실제 역사 속 사명대사는 조선 후기 최고의 의승장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서산대사에 이어 팔도도총섭에 제수된 그는 평양성 전투에서 승군을 이끌었고, 가토 기요마사와의 강화 협상에도 참여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정세를 살피고 조선인 포로들을 데리고 귀국하는 중책까지 맡았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야담 속에 등장하는 사명대사의 활약은 대부분 일본에 쇄환사로 갔다가 돌아온 이야기에 집중돼 있다는 것이다.
7년간의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집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임진왜란 동안 수많은 조선인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포로 가운데에는 도공이나 기술자처럼 일본이 필요로 한 사람도 있었지만, 평범한 농민과 부녀자, 어린아이들도 적지 않았다. 가족들은 그들이 살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고, 살아 있더라도 다시 만날 방법은 거의 없었다. 일본 각지에 흩어진 포로들을 찾아 데려오는 일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 스님이 조선인 남녀 3000여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는 소식은 단순한 외교 성과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는 전쟁 때 사라진 아버지와 아들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일본으로 끌려간 어머니와 딸이었다. 실록에 기록된 ‘3000여 명’은 하나의 숫자였지만, 백성들에게는 잃어버린 수천의 가족이 돌아온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일을 <선조실록>은 놀랄 만큼 간략하게 기록한다.
“유정(惟政)이 일본에서 돌아오면서 우리나라 남녀 3000여 명을 데리고 왔다.”
고작 한 줄이었다.
하지만 민중의 기억은 그 한 줄에서 멈추지 않았다. 민간에서는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어떤 위협을 받았는지, 왜왕 앞에서 어떻게 기개를 잃지 않았는지, 어떤 기지와 담력으로 포로들을 데리고 돌아왔는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마침내 <임진록>과 같은 소설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이 책의 저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각자의 기억과 바람이 더해지면서 사명대사의 이야기는 조금씩 살이 붙고 새로운 모습으로 전승되었다.
사명대사에 관한 이야기는 이후 <임진록>의 여러 이본에 흡수되었다. 임진왜란에 관한 여러 기억과 설화가 오랜 시간 덧붙여지고 변형되면서 수많은 이본이 만들어진 것이다. 어떤 이본에서는 이순신이 중심이 되었고, 어떤 이본에서는 김덕령이나 사명대사의 활약이 크게 부각되었다.
사명대사의 일본행은 특히 많은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실제로 적국에 건너갔고, 실제로 일본의 정세를 살폈으며, 실제로 수많은 포로를 데리고 귀국했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극적이었던 그의 행적에 쇠말과 독사, 폭우와 예언이 덧붙으면서 사명대사는 마침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신비롭고도 위대한 스님으로 다시 태어났다.
왜 조선의 민중은 이순신도, 곽재우도 아닌 사명대사에게 이토록 열광했을까.
물론 이순신 장군 역시 조선 백성들이 가장 사랑한 전쟁 영웅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장렬한 죽음으로 끝난다. 조선을 구했지만 자신은 끝내 살아 돌아오지 못한 비운의 영웅이었다. 곽재우와 김덕령의 설화에도 억울함과 좌절의 정서가 짙게 배어 있다. 특히 김덕령은 왜적이 아니라 조선 조정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임진록’ 같은 소설서 왜왕 무릎 꿇리는 승리자로 인식
민족의 자존심 회복하려는 마음이 빚어낸 집단적 서사
이에 비해 사명대사의 이야기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계속되었다. 그는 살아서 원수의 나라로 들어갔고, 왜왕과 장수들에게 굴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끌려간 백성들을 데리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의 이야기는 희생이나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다. 빼앗긴 포로들을 되찾고 적에게 경고한 뒤 귀환하는 승리의 서사였다.
임진왜란은 조선의 백성들에게 두려움과 슬픔, 분노, 그리고 상실의 기억으로 남은 전쟁이었다. 국토는 폐허가 되었고 가족들은 왜적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일본으로 끌려갔다. 왕은 백성을 버리고 피란했고, 위정자들은 그들의 상처를 보듬어 주지 못했다. 이런 시대에 사람들에게는 전쟁에서 이긴 영웅보다 무너진 자존심을 다시 일으켜 세워 줄 영웅이 절실히 필요했다.
사명대사는 전쟁터에서는 왜적을 무찌른 승병장이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적국으로 들어가 조선인 포로 3000여 명을 데리고 돌아온 스님이었다. 백성들이 그를 신승으로 만든 것은 단지 신통력을 믿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전쟁으로 무너진 삶을 다시 견디게 해 줄 이야기, 빼앗긴 가족이 돌아오고 적국마저 굴복시키는 치유의 서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사명대사를 한 사람의 스님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를 신승으로 기억했다. 그것은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전쟁의 상처를 견디고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마음이 빚어낸 집단적 서사였다.
[불교신문 3935호/2026년8월1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