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란 후 200년, 왜 스님들은 뒤늦게 국가의 ‘사액’을 원했을까

“표충사에 가면 표충사가 있으니 꼭 보고 온나.”
대학교 2학년 때 답사를 떠나며 교수님이 건넨 말이었다.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런데 밀양 표충사(表忠寺)에 들어가니 정말 절 안에 ‘표충사(表忠祠)’라는 이름의 사당이 있었다. 우리는 흔히 표충사라는 절 안에 같은 이름의 사당을 세운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표충사라는 사당이 세워진 후 절이 들어선 것이었다.
더욱 놀라웠던 사실은 이 사당이 임진왜란 직후가 아니라 전쟁이 끝난 지 120여 년이 흐른 뒤에 세워졌다는 점이다. 나라를 구한 승병장이었다면 전쟁 직후부터 추모해야 마땅할 것 같은데, 왜 한 세기가 지나서야 사당이 세워진 것일까.
사실 충신과 의병장을 기리는 사당은 이미 오래전에 세워졌다. 이순신 장군을 배향한 여수 충민사(忠愍祠), 의병장 고경명 등을 모신 광주 포충사(褒忠祠) 등은 이미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부터 건립되기 시작했다. 이후 현종~숙종대에 이르러 임진왜란 충신을 배향하는 사당과 서원이 사액(賜額, 임금이 이름을 지어 편액을 내리던 일)을 받는 경우가 크게 늘어났다.
사액은 단순히 국왕으로부터 편액을 받는 명예에 그치지 않았다. 국가가 그 사우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보호한다는 의미였다. 사액사우로 지정되면 제사 비용을 마련할 수 있도록 위전(位田)과 노비가 지급되었고, 기존에 보유한 토지에는 면세 혜택이 주어졌으며 일부 구성원은 군역도 면제받았다.
충성과 절의를 가치로 세워 왕권 강화에 나섰던 숙종
임진왜란 때 군공 세운 인물들 현창 움직임 활발해져
특히 숙종대에는 충신을 기리는 사우와 서원에 대한 사액이 크게 늘어났다. 환국이 거듭되며 붕당 간 대립이 격화되자, 숙종은 국왕에 대한 충성과 절의를 국가가 장려해야 할 가치로 내세우며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임진왜란 때 군공을 세운 인물들을 현창하려는 움직임도 더욱 활발해졌다.
그런 가운데 특별한 사당이 하나 등장했다. 바로 사명대사를 모신 밀양의 표충사였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 사당을 건립한 주체가 밀양의 유학자들이었다는 점이다. ‘표충암 사적기’에 따르면 “밀양부사 김창석이 1714년(숙종 40) 지역 유생들의 요청에 따라 사명대사를 추모하는 사당을 백하암(白霞庵) 옛터에 세우기로 하고 지역 스님들에게 모연하여 1721년(숙종 47) 봄에 암자를 완성하고 표충암(表忠庵)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사명대사의 고향이었던 밀양 사람들은 밀양이 배출한 임진왜란 최고의 승병장을 지역의 영웅으로 기리고자 했다. 이 지역 유생과 스님들은 사당을 건립하는데 그치지 않고 나라에 사액을 요청했다.
1738년(영조 14) 밀양 표충사가 영조로부터 ‘표충(表忠)’, 즉 충절을 현창한다는 뜻의 사액을 하사받자 전국의 사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나선 곳은 해남 대둔사(현 대흥사)였다. 대둔사는 서산대사의 가사와 발우가 전해지는 곳이었다. 사명대사의 제자인 허백명조스님이 서산대사의 의발(衣鉢)을 모시고 내려온 이후, 대둔사는 청허계(淸虛系)를 대표하는 사찰로 자리 잡았다. 대둔사 스님들은 “제자인 사명대사의 사당은 이미 표충의 편액을 받았는데, 스승인 서산대사에게는 아직 사액이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어찌 스승보다 제자가 앞설 수 있겠습니까”라며, 서산대사의 의발이 전해지고 있는 대둔사에 사액을 내려달라고 호소했다. 정조는 이 청을 받아들여 1789년(정조 13) 대둔사에도 ‘표충’이라는 사액을 내리고, 예관을 보내 서산대사의 사당에서 열리는 제향에 참여하도록 조치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함흥 석왕사가 나섰다. 1792년(정조 16) 석왕사 스님들은 “무학대사가 조선왕조의 창업을 도운 개국원훈(開國元勳)인데도 봉향하는 곳이 없다”며 무학대사를 기리는 사당에도 사액을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이 역시 정조는 거절하기 어려웠다.

그러자 묘향산 보현사의 스님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묘향산 보현사야말로 서산대사가 전국 승군을 일으킨 역사적 장소이자, 제자들을 길러낸 도량이라는 것이었다. 이 주장 또한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미 해남 대둔사에 있는 서산대사 사당에 ‘표충’이라는 이름을 내렸는데 또 같은 이름을 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1794년(정조 18) 정조는 보현사에 수충사(酬忠祠)라는 이름을 내렸다. ‘충절에 보답한다’는 뜻을 담은 새로운 이름이었다.
조선 후기에 공식적으로 국가로부터 사당에 대한 사액을 받은 사찰은 밀양 표충사, 해남 대둔사, 함흥 석왕사, 그리고 영변 묘향산 보현사까지 네 곳이었다. 하지만 이들 사찰 외에도 전국 여러 사찰에 의승장 스님들을 모신 사당이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해인사에도 사명대사의 사당이 있었다. 사명대사는 말년에 가야산 해인사에 머물다 입적했으며, 현재 홍제암에는 스님의 부도탑과 비가 전해지고 있다. 이에 해인사 스님들은 밀양의 표충사를 해인사로 이건해 달라고 나라에 요청하였으나, 밀양 유생들과 스님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고 말았다.
또한 금강산 건봉사 스님들은 “건봉사야말로 사명대사의 출가 수행처”라고 주장하며 사액을 청원했지만, 1797년(정조 21) 조정으로부터 거절당했다. 그러나 건봉사 스님들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1799년(정조 23) 불자들의 시주를 모아 사명대사의 사당인 수충각과 비석을 세우고, 독자적으로 사명대사를 기리는 공간을 조성하였다.
표충사, 대둔사, 석왕사, 보현사 외 여러 사찰 사액 청원
위상 강화, 승역 면제 등 정치·경제적 요인들 복합작용
이처럼 조선 후기 승병장을 기리는 사찰들이 잇달아 사액을 청한 데에는 단순히 고승의 공적을 현창하려는 목적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액은 국가의 공인을 받는 명예인 동시에 토지와 면역 등 현실적인 혜택도 뒤따랐다. 이종수 순천대 교수는 “당시 전국의 여러 사찰이 국가의 사액을 받으려 한 것은 사찰의 위상 강화뿐만 아니라 승역의 면제 등 정치적·경제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설명한다.
18세기 후반 이후 전국 사찰들에는 감당하기 힘들 만큼 과도한 승역(僧役)이 부과되고 있었다. 산성을 수비하는 군역뿐만 아니라 지방 관청과 향교, 서원, 양반가에서까지 사찰에 갖가지 물품과 승역을 요구해왔다. 그런데 사액 사찰로 지정되면 국가로부터 제사 비용 명목의 토지를 지급받을 수 있었을뿐만 아니라 각종 역의 부담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에, 사찰들은 앞다투어 사액을 원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는 불교계 내부의 위상 및 주도권 경쟁과도 밀접하게 맞닿아 있었다. 조선 후기 불교계는 청허 휴정(서산대사)의 제자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각 사찰은 자신들이 청허 휴정의 법통을 잇는 중심 도량임을 내세우며 불교계에서의 위상과 영향력을 높이고자 했고, 그 과정에서 국왕이 인정하는 ‘사액’은 무엇보다 강력한 권위의 상징이었다.
오늘날 사찰 안에 있는 표충사와 수충사라는 이름은 단순히 승병장의 충절을 기리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국가의 공인을 얻어 사찰을 지키고, 과도한 승역 속에서도 법맥을 이어가려 했던 조선 후기 불교계의 치열한 생존 전략이 함께 새겨져 있다.
[불교신문 3934호/2026년8월1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