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량기행칼럼●조선족이라는 디아스포라 그리고 심양민박

2020.11.27 표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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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양고궁에서 청 태조 누루하치의 복장으로 기념사진을 한 장 찍었는데, 정작 촬영하던 청년은 누루하치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약 2주간의 기행을 마치고 요령성 성도 심양으로 향했다. 심양은 중국에서도 빠지지 않는 대도시이다. 여행은 여러 종류가 있을 수 있는데, 이번 기행은 철저하게 배낭에 의한 탐사라고나 할까, 그야말로 리서치 여행이어서 경비 또한 예산을 넉넉하게 세울 수 없었다. 빠듯한 일정과 경비로 비교적 넓은 공간을 소화하다보니 시간이 짧고 치밀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게다가 중국은 한국인들에게는 무조건 3성급 이상의 호텔에서 묵게 하고 있어서 숙박료 또한 간단치가 않았다. 게다가 동북삼성과 내몽골 호북성 등은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한국인들의 탐사방문이 잦은 곳이다. 동북삼성의 경우, 집안 같은 데에서는 한국인들이 의당 고구려 옛 도성이나 광개토대왕 비석 등을 보려고 온다고 하지만, 적봉 등 내몽골의 홍산문화 고조선 고구려 유적 등지를 찾는 한국인들에게는 다소 곱지 않는 시선을 보내는 것 또한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는 이런 유적 위주의 기행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국인이기에 항상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었다.     


이러저런 고생을 하면서 여정을 마치고 심양에 오니 한결 마음이 놓이긴 했으나 숙소가 또한 문제였다. 그래서 조선족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탑가(西塔街)로 향했다. 한국에서부터 메모해 두었던 주소를 들고 민박집을 찾았는데 너무나 친절하게 맞이해 주어서 그동안 쌓인 피로를 일시에 날릴 수 있었다. 1인 1박에 100원(元)이면 비싸지도 않고 조식 까지 제공해 주었다. 방도 호텔 룸 못지않았고, 2인실을 혼자 쓰도록 하고 방안에 화장실 샤워시설까지 갖춰져서 불편함이 없었고, 와이파이(wifi)에 한국tv 시청까지 가능했다. 일단 여장을 풀고 조선족 식당에 가서 한국 음식을 먹고 숙소에 와서는 그대로 나가 떨어졌다. 약 2주간의 빠듯한 여정에 몸이 지쳤던 모양이다. 자고나니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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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양 빵디 민박 한국식 아침상.    


모처럼 아침 밥상을 받고 보니 식욕이 돋으면서, 집에 온 느낌이었다. 여행객은 나 한사람이고 다른 몇 분 들은 사업차 이곳 심양에 와 있는 분들이었다. 인간에게 음식은 너무나 중요한 삶의 요소요 조건이다. 또한 같은 언어를 쓰면서 살아가는 동족이라는 것도 삶의 1차적 군집 단위조건이다. 같은 음식을 먹으면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 담소를 나눈다는 것은 동족이라는 강한 유대행위요 공동체 소속원의 정체성이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같은 동족이라고는 하지만, 조선족과 같은 디아스포라가 있다. 저 이스라엘 민족이나 팔레스타인 등에 비하면 중국에 사는 조선족의 디아스포라는 그래도 삶의 조건이 좀 더 나은 편이다. 같은 한국인 출신이지만 중앙아시아의 고려인이라는 디아스포라는 정체성과 여건이 중국의 조선족 보다는 더 어려워 보였지만, 중국에서 만난 조선족들의 삶은 그렇게 심각해 보이지는 않았다.     


중국과의 수교 이후, 수차례 다니면서도 이번처럼 진지하게 조선족이라는 디아스포라는 개념을 심각하게 사유해 보지 않았었는데, 이번 기행에서는 리서치를 좀 할 필요를 느꼈다. 마침 서탑가에는 신화서점 분점이 있었는데, 조선족과 한국인을 위한 서점이어서 관련 서적들이 많아서, 자료를 구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중국조선족 력사독본》 <신영숙 저>를 읽고서 많은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중국 조선족의 역사는 중국 내 56개 소수 민족의 하나로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정식으로 법적인정을 받은 이름이 ‘조선족’이다. 그 전에는 조선인, 고려인, 한인(韓人). 한교(韓僑) 등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조선족 중국 이주의 역사는 명말 청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다. 19세기 중엽이후에는 조선농민들이 동북지역으로 이주해 왔고,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되자, 농민들과 애국지사 의병투쟁참가들과 그 가족들이 대거 이주해 왔고,1931년 통계에 의하면 63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후 일본제국주의는 조선반도에서 ‘집단이민’ ‘개척이민’을 모집, 강제적으로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주시켰는데, 1945년 8월경까지에 이르면 216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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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양 서탑가의 빵디 민박 집. 주인내외와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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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상기씨 내외가 운영하는 민박 집 주소.     


또 읽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종교현황에 관한 통계가 있어서 소개해 보면 1932년 연변일대는 기독교신도가 1만6천 2백 명 정도, 천주교는 1934년경 동북조선인들 가운데 신도가 1만 1100 명 정도, 불교의 경우 4월 8일 불탄절에는 일반인들도 절에 갈 정도였고, 1934년경 연변일대는 절14개에 신도 2400명 정도가 있었으나, 해방 후 조선족 사회에서 불교는 점차 사라졌다고 한다. 유교의 경우, 1934년 연변일대 유학신봉자는 1만 7천 명 정도였으며, 천도교 시천교 청림교 대종교 원종교 등 민족종교가 활동했고, 1932년 천도교도는 약 4천 명 가량 되었으며, 시천교 청림교 등이 존재했는데 청림교는 유불도가 포함된 종교로서 반일운동을 했다고 한다. 청림교는 1944년 룡정 서쪽 비암산 비밀집회 때 반일봉기 집회를 하다가 일본헌병의 습격을 받고 600명이 체포되었고, 상층골간들이 사형된 후, 자취를 감췄다는 비극적인 이야기에는 가슴이 아팠다. 대종교는 한때 상당한 세력을 형성 1만 5천 명 정도가 활동했다고 한다.     


나는 이 책을 읽고서 조선족이라는 디아스포라를 조금이나마 이해를 하면서, 빵디 민박 주인 고상기 씨에 대해서 관심이 갔다. 일제 때 할아버지 대에 충남 부여 근방에서 길림성 장춘근방으로 이주해 왔었는데, 그때 고상기 씨 아버지의 나이가 9세였다고 한다. 고상기 씨는 장춘 지역에서 성장을 했고, 다행이 한국과의 수교로 한국과 일본 등지에서 10여 년 간 갖은 고생을 하면서 부지런히 일을 해서 모은 돈으로 이곳에 아파트를 마련해서 빵디 민박집을 10여년 전부터 운영, 심양을 찾는 한국 분들에게 편의를 제공해 주고 있다고 했다.  


여행을 하다보면 숙식만큼 중요한 것 또한 없다고 본다. 그리고 편안함을 느끼면서 편리하고 아늑한 휴식 공간이어야 하고 주인의 친절함과 주변 사정에 대한 정보 제공도 중요한 요소가 되는데, 빵디 민박은 이런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다. 딸 둘인데, 자신은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자식 농사는 잘 지어서 딸 하나는 교수 생활을 할 정도로 성공한 중산층 조선족으로서 만족한 삶을 살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하고나면 커피 타임을 하면서 이런저런 화제로 담소를 나눴던 시간이 추억으로 남았다. 심양을 찾을 기회가 있는 분들은 서탑가의 조선족(한국) 타운에 있는 빵디 민박에서 휴식을 취해 보는 기회를 가지시기를 권한다.     


코리아타운에서 며칠 쉬면서 독서와 심양 시내 관광으로 시간을 보냈는데, 심양은 중국말로는 선양(沈陽)이라고 발음한다. 중국 랴오닝 성의 성도로서, 둥베이 3성에서 제일 큰 도시이며 경제, 문화, 교통, 군사의 중심지라고 한다. 국가역사문화명성(國家歷史文化名城)에 선정된 관광 도시로, 만주족은 묵던(Mukden)이라고 부르고, 유럽 사람들에게도 만주족은 묵던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선양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심수지양(沈水之阳)에서 유래된다고 하는데 7200년에 이르는 아주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으며, 17세기 초반, 사르후 전투에서 승리한 만주족의 누르하치는 선양을 점령하고 1625년 후금의 수도로 정했다고 한다. 1634년에는 성경(盛京)(만주어: 묵던)으로 개칭하였다. 그 후 청나라로 이름을 고친 후금은 1644년 명나라를 멸망시킨 후 중국을 점령하고, 수도를 베이징으로 변경하지만, 선양은 제2의 수도 대접을 받아 1657년에는 봉천부라고 명명되었고, 형식적이나마 중앙정부에 준거한 관제를 행사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시내에는 그 때의 황궁·선양고궁이 남아 있다.     


선양은 36개의 소수 민족이 거주하며 한족이 91.26%를 차지한다. 36개의 소수 민족은 만주족 (满族), 조선족{朝鲜族), 후이족 (回族), 시버족 (锡伯族), 몽골족 (蒙古族) 등이 거주하고 있다. 심양에서 며칠 쉬면서 시내관광을 하고 서탑 거리에 있는 신화서점에 가서 조선족에 관한 책도 사고, 다른 거리에 있는 서점에서는 이것저것 필요한 서적을 구입해서 독서도 하고 조선족들과 대화도 나누면서 시간을 보냈다. 납량기행 칼럼은 이상으로 끝을 맺고, 차회부터는 현대세계불교 연재를 하려고 한다.     

중국 심양에서 = 이치란 박사(매일종교신문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