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량기행칼럼●장전불교와 청나라

2020.11.27 표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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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행에서 필자의 관심은 동북 삼성과 내몽골의 불교문화였는데, 다니다보니 여러 가지 주제가 부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상고사인 고조선. 부여. 숙신. 고구려. 발해 등의 역사이고, 우리 한민족과 관련이 있는 역사유적과 강역을 지나간다는 설렘이었다. 여기에다가 한 세기 전의 청나라와 만주족 등이 키워드로 떠올랐다.      


하지만 필자는 다른 주제는 잠시 뒤로 하고 전공분야인 불교, 즉 장전불교(티베트)에 국한해서 리서치를 하고 현장을 답사한다는 원칙과 몽곡족에 대한 관심이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조 중후기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주목을 하게 되었다. 내가 건성으로나마 읽은 교양도서가운데 이 책도 포함되긴 하지만, 귀국해서 정독을 하게 되었고, 특히 황교문답(黃敎問答=라마교에 대한 문답).반선시말(班禪始末=반선의 내력).찰십륜포(札什倫布=반선을 만나다)를 정독했다. 《열하일기》 2. 돌베게. 김혈조 옮김. 그리고 정독한 책은 《欽定 滿洲源流考》 上,下권이다. 글모아. 남주성 역주. 이 책 또한 몇 년 전에 구입해서 대강 읽고 서가에 두었던 것을 꺼내서 정독했는데, 실감이 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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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령성 부신 몽고족 부몽현 해당산에 있는 티베트 사원  


티베트불교는 중국·인도(라다크).부탄.시킴.네팔(히말라야)·몽골(러시아)·만주의 일부 지방에서 발달한 대승불교의 밀교종파이다. 인도의 대승불교 후기 밀법(密法) 전통이 티베트로 전해져서 중국에 전해진 밀교를 장전불교(藏傳佛敎)라고 한다. 인도-서역-중국으로 전해진 밀교는 한전불교(漢傳佛敎)의 대승불교에 포함된다. 티베트불교는 티베트의 국왕이 불교에 의거한 통치를 위해 대승불교를 도입했다. 불교도입을 위한 문자를 제정, 산스크리트어의 경전을 정역(正譯)할 수 있었고, 현재는 산스크리트어 경전이 소멸한 상태에서 티베트 경전어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티베트 불교는 라마교라고도 불리는데, ‘라마(La­ma)’는 구루(Guru), 즉 스승(師)을 뜻하는데 불(佛)·법(法)·승(僧)의 3보(三寶)에 법을 전하는 사(師)를 더하여 4보(四寶)라 하고, 여기에도 귀의한다. 이러한 특색을 라마교라고 부르게 되었다.     


10세기에 이르면 티베트 불교에 대한 정체성 문제가 대두되었고, 몇 개의 종파가 각축을 벌이게 되었고, 13세기에는 몽골제국에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15세기에 이르면 개혁불교가 나타나게 되고, 그 주인공은 쫑카빠(Tsong­ka­pa·宗喀巴:1357~1419)였는데, 그는 동 티베트의 암도 지역인 지금의 청해성 시닝 시 부근에서 태어났고, 나중에 큰 스님이 되고나서는 현세의 이익을 비는 주술(呪術)을 배척한 계율 준수의 종파를 창시했는데, 티베트의 수도 라싸의 동남쪽에 있는 간단사(寺)를 중심으로 하여 이 개혁불교운동을 전했는데, 이 종파를 겔룩빠(Gelugpa=黃帽派)라고 불렀다. 나중에 이 파의 종지는 티베트와 동 티베트 중국 몽골에 널리 퍼지게 되었는데, 계율을 중시한 겔룩빠는 대처(帶妻)를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윤회(輪廻)에 의한 전생설(轉生說)로 후계자를 얻었다. 뒤에 겔룩빠는 라싸의 포탈라사(寺)와 시가체의 타시룬포사(寺)로 분열, 쫑카빠의 두 명의 제자가 각각 라마의 칭호를 가지고 이들 사찰들을 근거로 하여 법맥(法脈)을 유지하였고 이런 전통은 몽골과 중국 즉 청나라에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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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족 라마와 필자.    


이런 장전불교의 역사적 배경아래, 이번 기행에서는 두 개의 장전불교 중심사원을 방문했는데, 처음 간 사찰은 요령성 부신시 몽고족 부몽현 대판 해당산에 있는 보안사를 찾았다. 규모가 제법 큰 사찰이었는데, 티베트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사원이었고, 몽골족 자치현에 있었고, 사원은 몽골족 라마들이 수행하고 있었다. 이 사원은 티베트 라싸의 달라이 라마 주석 사찰인 포탈라궁을 모방해서 건립했다. 이 사원은 청나라 때, 1683년에서 1883년에 걸쳐서 티베트 제6세 판첸라마를 위하여 세웠던 사원이다. 한때 이 사원에는 수천 명의 라마들이 공부했었고, 주로 몽골족 라마들이 기거했으며, 현재도 몽골족 라마들이 지키고 있었다. 관광 사찰로 만들기 위해서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사원의 편액은 만주.몽골.한문.장문(티베트) 등 4개의 문자로 동시에 새겨져 있었다. 만주족은 중국불교 전통보다는 장전불교(티베트)를 받아 드렸고, 장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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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륜기 삼대사에서 몽골라마와 필자.   


건륭황제는 이 사원 말고도 황제는 그의 나이 70세를 기념하여 제6대 판첸라마를 위하여 지금의 호북성 승덕에 수미복수지묘(须弥福寿之庙)를 또한 건립했다. 이 사원은 판첸라마의 주석 사찰인 티베트 시가체의 타쉬룬포 사원(吉祥須弥寺)이 모델이었고, 판첸라마는 아미타불의 화신(化身)이며, 티베트 시가체에 있는 타쉬룬포 사원이 주석처이다. 건륭황제(청나라 고종1711〜1799)는 60년간 재위하면서 많은 일을 한 황제로 알려져 있다. 필자는 이번 기행에서 이 사원에는 직접 가보지를 못했다. 다만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으면서 간접 경험을 하고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직접방문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지만, 책을 통해서 너무나 감명 깊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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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연암 박지원이 방문했던 승덕 피서산장의 수미복수지묘 티베트 사원.    


청나라는 동북 지역에서 일어났고, 심양에 그들의 베이스를 두고 베이징에 수도를 청했는데 여름철이면 황제들은 호북성 승덕에 있는 피서산장(避暑山莊)으로 이동해서 쉬면서 집무를 봤다. 이런 과정에서 건륭황제는 당대의 티베트 고승 제6세 반선라마(판첸라마)를 북경에 초청, 이곳 피서산장에 대찰을 건립해서 그가 머물도록 했다. 몽골과 티베트를 통치하기 위한 정략적인 의도도 숨어 있었다고는 하지만, 황제가 장전불교와 판첸라마를 존경한 돈독한 불교도 왕이었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연암의 《열하일기》에 묘사된 피서산장이라든지 건륭황제 그리고 수미복수지묘 티베트 사원의 반선라마 등에 관한 기술은 너무나 흥미진진한 읽을 거리였다.    


지면관계상 여기서 더 구체적으로 소개할 수는 없지만, 연암의 《열하일기》를 통해서 당대의 중국에서의 장전불교(티베트)와 조선의 불교사정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이어서 나로서는 너무나 유익하고 값진 독서였다. 장전불교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는 필자로서는 현장답사 위주의 기행에 필적하는 독서기행이었다. 외몽골이나 내몽골에도 장전불교의 전통이 살아 있고, 외몽골은 공산혁명이후 70년간 관제불교였다고는 하지만, 몽골불교의 전통이 다시 부흥하고 있고, 내몽골은 문화혁명 기간을 빼고는 장전불교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해당산의 보안사나 승덕의 수미복수지묘가 티베트 건축양식에 의한 사원이라면 내몽골 통료시의 고륜기(库伦旗)의 고륜삼대사(库伦三大寺)는 순수한 몽골전통의 사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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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륜 삼대사 정문에서 필자.  


세 개의 사찰인 흥원사(興源寺) 복연사(福緣寺)와 상교사(象敎寺)가 함께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한때 몽골불교의 행정총본부 역할을 했던 사원들이다. 흥원사는 정교(政敎=행정), 복연사는 재정, 상교사는 라마들의 주석사찰의 기능을 가졌었고, 건축양식은 몽골 티베트 중국식의 혼합형이다. 흥원사는 순치황제 치세인 1649년에 건립이 시작되었고, 티베트 대장경이 보관되어 있으며, 복연사는 건륭황제시대인 1742년에 건립되었으며, 상교사는 강희9년 1670년 흥원사 동측에 건립되었다. 한때 이 사원에는 수천 명의 몽골라마들이 주석했으며, 티베트에서 라마들이 수시로 왕래하고 몽골불교의 중심역할을 하였던 몽골불교 성지역할을 하는 사원들이다. 

내몽골 자치구 고륜기 삼대사에서 = 이치란 박사(매일종교신문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