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 업장과 해탈열반

2020.11.27 표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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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7-03 (월) 15:00


업장과 해탈열반


불교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 답은 해탈열반이라고 할 수 있다. 해탈은 탈을 벗는다는 의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탈은 무명업장(無明業障)을 말한다. 무명은 밝지 못한 식(識)을 의미한다. 업(業)은 산스크리트어 낱말 카르마(कर्म Karma)의 번역어이다. 원래는 행위를 뜻하는 말로서 인과(因果)의 연쇄관계에 놓이는 것이며 단독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의 행위는 그 이전의 행위의 결과로 생기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미래의 행위에 대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거기에는 과거·현재·미래와 같이 잠재적으로 지속하는 일종의 초월적인 힘이 감득(感得)되어 있으며 흔히 시간(時間:Kala)·천명(天命:Daiva)·천성(天性:Svalhava) 등의 말로 표현되고 있다.


사진1: 티베트 불자들이 삼보일배의 오체투지로 성지순례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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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인도의 고전인 《마하바라타》에서는 "업은 어떤 사람도 피할 수가 없으며 그림자가 형체에 따라다니듯이 업은 서 있는 자의 곁에 서 있고 가는 자의 뒤를 따라가며, 행위하는 자에게 작용을 미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인과관계에 입각한 행위론은 당연히 선업선과(善業善果)·악업악과(惡業惡果)와 같은 윤리적인 인과의 법칙을 낳게 하였다. 바라문교 사회에서는 어떤 특정의 카스트에 태어난다는 것도 그에 상응하는 전생의 행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업 사상은 광범위하게 인도 제종교의 전체 속에 들어 있어서 불교 및 자이나교에서도 특색 있는 업설(業說)을 전개하였으나, 인도사상의 정통(正統)인 브라만교나 힌두교에서 가장 강조되었다.


물론 불교에서도 어느 정도 업설(業說)을 수용했지만, 대승불교에 오면, 업이란 한갓 마음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한다. 《화엄경》에서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임을 강조한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드는 것이 지나지 않는다는 환영(幻影)에 불과한 것이라고 설파고 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업을 말하고 또한 불자들에게 업의 소멸을 위해서 정진하라고 가르친다. 업의 소멸에는 여러 가지 방편이 있다. 그것은 자력적인 방법, 타력적인 방법이 있다.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업장 소멸의 방법도 자력 타력의 수행이 있는데, 특히 티베트 불교에서는 오체투지 같은 어려운 수행과정을 통해서 업장을 소멸하면서 불교성지에 이르는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원래 오체투지(五體投地)란 인도나 티베트불교의 전승이다. 머리와 가슴, 팔, 다리, 배의 다섯 부분이 땅에 닿게 하는 절을 이른다. 삼보에 올리는 지극정성의 예경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접족례(接足禮=발에 손을 대면서 인사하는 법)가 이어졌다. 절을 하면서 공경하는 이의 발을 두 손으로 떠받드는 예절이다. 실제로 지금도 인도나 티베트에선 이런 오체투지만으로 성지순례를 하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 몇 년씩 걸리는 적도 있다고 한다. 요즘은 가슴까지 가려지는 고무 옷을 걸치고 한다. 도저히 옷이 당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체투지에서는 완전히 큰 대(大)자로 엎어 진 이후에 일어나게 된다. 삼보에 대한 최경례를 상징하는 자세다. 절대항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점이 우리네 큰 절과 다르다. 선불교에서는 화두공안만 타파하면 업장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최상승의 근기가 아니면 해 낼 수 없는 최고의 수준이다.    


사진2; 우리나라에서도 삼보일배와 오체투지가 가끔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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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업장이 다 소멸하면 해탈이 된다. 해탈이란 자유의 마음이 되고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다. 해탈은 자유 분망이 아니다. 마음이 걸림 없는 상태에 이르렀음을 말한다. 신족통(神足通)이란 말이 있듯이 자유자재한 경지에 이르러서 걸림 없는 무애행의 경지에 오른 상태가 바로 해탈경지인 것이다. 해탈은 바로 열반의 경지이기도 하다. 열반(涅槃)이란 문자 그대로 ‘바람 등이 불기를 멈추다.’는 뜻을 갖고 있다. 또한 ‘촛불 등을 불어서 끄다·’ ‘촛불 등이 불어서 꺼진 상태’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निर्वाण)를 음을 따라 번역한 말이다. 중국에서는 뜻을 따라 번역하기를, 적멸(寂滅)·멸도(滅度) 등이라고도 했다. 불교에서는 번뇌에 속박된 현상 세계를 차안(此岸:이 언덕)이라 하고 열반의 세계를 피안(彼岸:저 언덕)이라고도 한다. 열반은 번뇌의 불을 꺼서 깨우침의 지혜를 완성하고 완전한 정신의 평안함에 놓인 상태를 뜻하는데, 불교의 수행과 실천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열반의 이상경(理想境)은 일체의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解脫) 있으므로 적정(寂靜)한 것이라 하여 일반적으로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고 말한다. 열반적정(涅槃寂靜)은 일체개고(一切皆苦)·제행무상(諸行無常)·제법무아(諸法無我)와 함께 불교의 근본 교의인 사법인(四法印)에 속한다.


요즘 신도님들은 이런 복잡한 교리를 설명하면, 하품을 한다. 불자라면 교리공부도 하고 참선도 해보고 경도 읽고 해야 하는데, 어렵다고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신도님들에게 기도정진이라도 많이 하도록 하다 보니, 어떤 때는 너무 기복으로 흐르지 않나 하는 우려도 하게 된다. 신심도 중요하지만, 맹목적인 신심을 정도로 이끌어 주는 체계적인 신도 교육이 필요하다. 경지가 높은 신도님들은 말 하지 않아도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방법을 알고 있기에 문제가 없다.    


재약산인: 도원 법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