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 선조사님들 각령께

2020.11.27 표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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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사님들 각령께


한국의 전통 절에는 대부분 부도탑전이 있다. 천년 고찰들은 부도전(스님들의 공동묘지) 또한 아름답게 느껴진다. 세속의 공동묘지는 어딘가 으스스하지만 절의 부도전은 오히려 운치가 있고 하나의 문화로 인식되고 있다. 평생을 무소유의 삶을 살다간 스님들의 부도전이기에 부도탑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고 뭔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부도는 원래 불타(佛陀)에서 유래한 말인데, 나중에는 승려들의 묘탑을 부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부도를 세우는 것은 불교식 장례법에서 생겨난 것이지만 불교가 전래된 때부터 묘탑의 건립이 시작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4세기 후반이지만 연대가 그때까지 올라가는 묘탑은 문헌상으로도 볼 수 없다. 다만 627∼649년경에 원광법사(圓光法師)의 부도를 세웠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이 시기를 부도 건립의 시초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실물은 전하지 않고 844년(문성왕 6)에 조성된 전흥법사염거화상탑(傳興法寺廉居和尙塔, 국보 제104호)이 가장 오래된 부도로 추정되고 있다. 본래 부도의 건립은 법제문도(法弟門徒)들이 선사(先師:돌아가신 스승)를 섬기는 극진한 마음에서 스승이 입적(入寂)한 뒤 온 정성을 다하여 세우는 것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9세기에 이르러 당나라에서 선종(禪宗)이 들어온 이후 부도의 건립이 크게 유행하였다고 한다.    


사진1: 표충사 부도전, 가운데 자연석 바위 위에 세워진 부도탑은 조계종 통합종단 초대 종정을 역임한 효봉 대선사의 사리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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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사도 신라시대부터 절이 있어왔다. 원효대사가 창건한 죽림사(竹林寺)를 신라 흥덕왕 때 황면(黃面)이 재건하여 영정사(靈井寺)로 개칭한 절이지만, 지금의 규모로 절이 크게 세워진 것은 사명대사를 제향하는 사당을 서원(書院) 급으로 격(格)을 갖추면서이다. 절과 함께 표충서원(表忠書院)이라 편액하고 일반적으로 표충사로 불렀는데, 이 사당을 사찰에서 수호(守護)하여 왔으므로 사(祠)가 사(寺)로 바꾸어진 것이다. 원래의 표충사(表忠祠)는 밀양시 영축산에 있던 백하암(白霞庵) 자리에 있었으며, 사명대사의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나라에서 사원(祠院)을 세우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는데, 그 뒤 병자호란이 일어나 승려들이 흩어지고 폐허가 되었던 것을 1714년(숙종 40)에 밀양 군수 김창석(金昌錫)이 사명대사의 충훈을 알고 퇴폐된 것을 민망스럽게 여겨 지방유지와 승려를 불러 사우를 다시 세울 것을 의논, 관찰사 조태억(趙泰億)에게 보고하여 조정에 계(啓)를 올려 나라에서 제수(祭需)를 내릴 것을 청하여 사당을 다시 세워 사명대사와 사명대사의 스승인 서산대사(西山大師),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싸움에서 전사한 기허당(騎虛堂)의 영정을 모셨다. 그 뒤 남붕(南鵬)이 크게 중창하고자 1738년(영조 14)에 사명대사의 행적(行蹟)을 갖추어 임금에게 올리니, 임금이 교지를 내려 표충사의 잡역(雜役)을 면제하고, 전답(田畓) 5결(結)을 내리고 경상도 관찰사에게 중수하도록 명하였다.


이후 지금으로 자리로 표충사를 옮기게 된 것은 향례(享禮)를 지낼 때마다 바람과 비를 만나게 되고, 산세가 옹색하고 길이 험하여 살고 있는 자나 제향에 참여하러 다니는 사람 모두 이를 병폐로 생각하여 불편함이 많았는데, 남붕이 옮기려고 뜻을 세웠으나 실현하지 못하다가, 1838년(헌종 4) 사명대사의 8세손인 천유(天有) 선사가 예조에 보고하여 부사 심의복(沈宜復)의 도움으로 1839년에 영정사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그러므로 표충사 자리에는 신라 시대부터 절은 있어 왔지만, 현재의 표충사 규모의 사찰이 들어선 것은 1839년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영정사는 터만 있었지 스님들이 거의 살지 않을 정도였다. 천유선사는 사원의 배치를 옛날 체제대로 하여 영정사 관음전 자리에 사우를 신축하고 사명대사 원불을 대웅전 대들보 위에 봉안하여 예제문 3칸과 자하문 3칸, 명연루 3칸, 정문(正門)을 짓고 의중당 좌우(左右)를 동·서 재실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명부전(冥府殿) 자리에 영당(影堂)을 건립하였다. 남계료(南溪寮)는 심검당(尋劒堂)으로, 원통료(圓通寮)는 설법당(說法堂)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나한전(羅漢殿) 등은 그대로 두었다는 기록이다.


사진2: 표충사 소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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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표충사의 역사와 기록을 검토해 보면, 부도는 대개 조선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표충사 부도전에 모셔진 스님들은 표충사에서 평생 수도하시다가 이곳 표충사에서 입적하신 분들이다. 우리나라 사찰의 모든 부도탑에는 그 사찰에서 수행하다가 열반하신 큰 스님들의 사리탑이 봉안되어 있다. 한 분 한 분 스님들이 계셨기에 오늘날 한국불교는 그리고 사찰은 우리나라의 문화재로서 국가의 문화유산의 거의 70% 이상을 차지해서 후손들은 긍지를 갖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민족 고유의 설 명절을 맞아서 선조사님들 각령께 영반의 예를 올리나이다.


재약산인: 도원 법기